우리 시대 라오디게아.
우리 시대 라오디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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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시대.계시록 3:15-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읽을 때, 성령께서는 이 시대에 대하여 한 가지도 좋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는 두 가지 죄목을 들어서 그것에 대해 선고하십니다.
(1) 계시록 3: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우리는 이것을 주의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무리는 미지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미지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부릅니다. 그 벌은 하나님의 입에서 토해 내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가는 것처럼 우리도 어긋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리석게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의 입에서 뱉아내실 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끈질긴 인내에 대한 교리에 아무런 진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각을 지금 바로 고쳐드리고 싶습니다. 이 절은 한 개인에게 해당되는 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해당되는 절입니다. 그는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입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음을 상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를 자기의 품에 품고 계십니다. 저 옛날 시간이 있기 전 알려지지 않은 시대들 동안에 우리는 그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양우리 안에, 그의 초장 안에 있지, 결코 그의 입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의 입에 뭐가 있습니까?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입 속에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의 몸이 됨을 압니다.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여기입니다. 교회의 입 속에 무엇이 있게 될까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마지막 날의 이 사람들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말씀에 대해 열심을 품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해 미지근합니다. 저는 지금 당장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침례교는 말씀에 근거한 자기네 신조들과 독단들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은 그들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사도 시대는 끝났고 믿음에 수반되는, 성령의 침례도 없다고 말합니다.
감리교는(말씀에 기초하여) 물침례는 없고(물뿌림은 침례가 아닙니다) 성화가 성령 침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생의 침례를 강조하는데 너무도 많은 경우를 보면 그들은 맹숭맹숭한 죄인으로 내려갔다가 눈물젖은 죄인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교회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노라고 주장합니다. 쭉 내려가서 오순절 교인들에게 가 보십시오. 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말씀으로 시험해 보십시오. 그들은 거의 매번 감정을 취하기 위해서 말씀을 버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말씀에 있든 없든 또는 말씀에서 적절하게 해석된 것이라 해도, 기름과 피와 방언과 다른 표적들 같은 은사 표명을 나타낼 수 있다면, 대다수는 그것으로 인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은 문 밖으로 쫓겨났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대적하리라. 너희를 내 입에서 내치리라. 이것이 끝이다.
일곱 시대 중에서 일곱이니까, 나는 인간이 내 말보다 자기 자신의 말을 존중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내가 너희를 내 입에서 토해 내리라. 모두 끝장이다. 나는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기 교회 한 가운데 있다. 충성되고 참된 하나님의 아멘이 자신을 계시할 것이고 그것은 내 선지자로 말미암아 되리라. 오,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계시록 10:7, 일곱째 사자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그는 입증받은 한 선지자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는 약 이천 년 후에 한 선지자를 보내시고 계십니다. 그는 조직과 교육과 종교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을 보내시는데, 침례 요한과 옛날 엘리야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만 들을 것이고 주께서 가라사대 를 가질 것이고 하나님을 대변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mouthpiece)가 될 것이고 말라기 4:6에 선포된대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 돌릴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날의 택함받은 자들을 돌이킬 것이고 그들은 입증받은 선지자가 주는 바울 때에 있던 말씀과 똑같은 진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가졌던 진리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그와 함께한 그 택함받은 자들은 진실로 주님을 나타내는 자들이 될 것이고 주의 몸이 되고 주의 음성이 될 것이며 주님이 하던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해하시겠습니까?
잠시 교회사를 보면 이 생각이 얼마나 정확한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암흑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전적으로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를 말씀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루터교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을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을 만들었고 다시금 순수한 말씀은 자리를 잃었는데 조직은 단순한 말씀에로가 아니라 독단과 신조들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웨슬리를 보내셨고, 웨슬리는 그의 시대에 말씀을 가진 음성이었습니다. 웨슬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알려진 그들 세대를 위한 살아있는 서신이 되었습니다. 감리교가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세우시고 그것도 해를 거치면서 똑같이 되어버렸는데 마침내 이 마지막 시대에는 다시금 그들의 사자 밑에서 마지막 시대에 주는 마지막 음성이 될 또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 있게 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교회는 더이상 하나님의 대변자 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의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게서 등을 돌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선지자와 신부를 통해 교회를 혼란케할 것인데, 하나님의 음성이 신부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마지막 장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세상은 오순절 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말씀 신부는 첫째 시대에서처럼 배척당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 마지막 시대에게 외치십니다, 너희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은 이전 시대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말씀을 분리하고 조각조각내고, 원하는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빼는 것 말고 말씀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너희들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는데만 관심을 두고 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차가워서 그것을 거절한다면, 나도 참을 수 있겠다. 네가 그 진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느라 열심낸다면, 나는 너를 칭찬하겠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받기만 하고 그 말씀을 존중하지 아니하니, 나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야 하겠다. 너는 내 속이 거북하게 하므로 너를 토하리라.
그런데 누구나 미지근한 물이 배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러분이 구토를 해야한다면, 미지근한 물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미지근한 교회는 하나님을 아프게 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을 토해내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홍수 전에 하나님이 어떠했을지 짐작케 하지 않습니까?
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하여 차갑든지 뜨겁든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고로 좋은 일은, 교회가 열렬한(뜨거운)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질 않습니다. 판결이 언도되었습니다. 교회는 더이상 세상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렇다고 주장할 테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 하나님은 아직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음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신부에게 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 음성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고 앞으로도 더 얘기할텐데 신부 안에 있습니다.
(2) 계시록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런데 이 절 처음 구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보십시오,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16-17절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말한다해도, 그것을 옳게 하지는 않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자기가 하나님을 대변하며 자기가 주님의 확실한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토록 영적으로 악할 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씨를 나타내고 있고, 우리는 그 씨가 어디에서 나온 씨인지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평가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를 바라보았고 그것이 교회가 본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고 말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 것들에 부유하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야고보서 2:5-7 앞에서 자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그런데 저는 부자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을 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주 소수만 부자임을 말씀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 교회의 몸 안에서 우세하는 쪽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치부하게 되면, 우리는 딱 한 가지를 압니다: 이가봇(슬프도다 영광이 사라졌도다) 라는 말이 교회 문 위에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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